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말인즉슨 멋진 말이다. 그리고 책 한권 읽어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
킬 수 있다면, 누군들 책읽기를 마다할 수 있으랴. 그러나 세상은 결코 책 한권 읽어서 인간으로
서의 자존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몰랐던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그토록 책 타령
을 했던 것일까. 물론, 사는 것이 팍팍해지면서 오락문화비 줄고 술 담배 소비가 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속칭, ‘욱하는’ 마음이 치밀어서 그런 ’우습지도 않은‘ 소리를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좋지요, 하지만,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을 때
는 어떡하지요? 하는, 세상 한 켠에서의 날카로운 힐난과 분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힐난과 분노의 소리를 내게 보내는 이들은 다름 아닌 경기도 용인시 동백택지개발지구에서 일
을 하고 있는 건설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사실, 그 힐난과 분노의 주인공들이 어찌 그들 뿐이겠
는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따위 잠시 유보
해 둘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그렇다고 그들에게 자존심이 없
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거기에다 대고 책을 읽읍시다, 운운했던 나의 아둔함에 나는 치를
떤다.
먹고살기 어려운 이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하고 말할 때, 나는 거기서 도덕을 느낀다. 먹
고살기가 위중한 이들에게 먹고살기 위한 몸짓은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다. 그러나 반대로
먹고 살만한 이들이 똑같은 말을 할 때, 그 말에서 나는 음습한 부도덕의 기미가 느껴진다. 먹
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파업이며, 무슨 문화며, 무슨 역사며, 무슨...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먹
고 살만한 이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하는 순간 그들은 그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스
스로의 존엄을 상실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용인 동백지구 건설노동자들이 건설노동자들로서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노가대’라고 하는
이들로서는 거의 최초로 이제 다시 내입으로 말하기가 쑥스럽게 되어버렸지만, 그러나 명명백백
하게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그 지
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란 책을 읽어야만 지켜지는 게 아니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싸움을 해야만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나는 다만 부끄럽고 숙연해질 뿐
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이전에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에 온몸을 맡기는 일
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자’들의 글 조각이 과연 무엇
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이제 동백지구 노동자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현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절망과 희망
을 동시에 보게 되는 것이다
‘아침 일곱시에 나와서 저녁 일곱시까지 꼬박 열한시간을 일하고도 잔업수당은 받지도 못하
는’ 현실, ‘일을 하는 노동자는 총 350명인데 샤워꼭지는 10개밖에 없어서 땀범벅에 먼지를 뒤
집어써도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현실, ‘작업복을 갈아입을 데도 없어 길가에서 갈아입을 수밖
에 없는’ 현실, ‘산재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공상처리를 하라며 계속 압력을 가하
는’ 현실, 무엇보다 ‘하도급에 또 도급을 주어 마지막으로는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낼 수밖에
없는 구조의 건설현장’의 현실... 이런 현실 앞에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그런 중첩된 절망적인 풍경 앞에서도 가녀린 희망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
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모든 노동현장에서의 싸움이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은 결
코 아니다.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을 독려 고무하는 80년대식 노동소설을 쓰자는 것도 아니다. 그
러나 저 70년대의 전태일이 몸에 불을 붙여서라도 고발할 수밖에 없었던, 차마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요구하는 노동현실이 지금 이 땅 건설현장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을, 그리고 그런 현실에 있는 이들에게 책읽기로서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하
나의 폭력이요, 기만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통렬한 심정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 것을 기회로,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멋진 말 이면에, 인간으로서 최소
한의 자존심조차도 지킬래야 지킬 수 없는 노동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명백히 소용에
도 닿지 않을 소리를 했던 나는 그러면 ‘노사정 대타협’의 방해꾼인가, 협력꾼인가.
공선옥의 살아가는 이야기 -35] 말할 수 있음의 폭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