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평화포럼 에서 권철현(국회의원) 은 10일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1997년에 쓴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 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유라시아는 세계 일등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체스판이다.
그 투쟁은 지정학적 이익을 전략적으로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지정학적 전략(geostrategy)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브레진스키의 진단은 적절한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동북아시아야말로 체스판 중의 체스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미국의 입장이 아닌 한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에서도 이 지역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체스판인 셈이다.
주지하듯이 동북아시아는 냉전 시대의 한복판이었으며 탈냉전 시대인 지금도 냉전의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 핵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냉전 상황, 즉 언제든지 열전 상황으로 돌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은 한자와 유교 문화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역사적으로 좋지 못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과거에 발목이 잡혀 갈등을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치열한 경쟁은 동북아시아의 안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국의 세계 전략 혹은 동북아시아 전략이 동북아시아의 안보와 역학 관계를 상당 부분 규정한다는 점이다. 북한 핵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줄다리기, 이와 연계된 각 나라마다의 복잡한 관계망이 동북아시아의 체스판을 잘 말해주고 있다. 특히 한국은 남북 분단과 냉전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이것이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에 커다란 밑거름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 내에서는 미국이 과연 우리 편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고,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과 미국 배심원들에 의한 피의자에 대한 무죄 결정 등 일련의 사건으로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이 점차 커져 왔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탄생한 문민 정권들이 국민의 정서를 감안하고 변화된 시대 상황에 부응하면서 콘크리트 같은 한미 동맹에 일정한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세계 전략 및 동아시아 전략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이런 시점에서 노무현 정부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구상 을 발표한 바가 있으며, 금년 2월 25일에 있었던 대통령 취임 2주년 국회 국정 연설과 3월 22일의 육군제3사관학교 제40기 졸업 및 임관식 등을 통하여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노 대통령은 위의 사관학교 행사장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역사 이래로 주변국을 침략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우리야말로 떳떳하게 평화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의 배경을 가장 잘 성명해 주는 대목일 것이다.
이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하여 주변 국가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 비하여, 한국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져 왔다. 반대자들은 동북아 균형자론 의 취지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는 이로 인한 주변 국가들, 특히 미국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개념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앞에서 소개한 노 대통령의 언급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과거나 현 시점에서나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가장 바라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며 따라서 자격과 설득력 면에서 한국이 평화 조성의 적임자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말하자면 세력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보다는 균형 외교를 통하여 지역 갈등의 중재자가 되겠다는 각오로 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 토론자는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그런 입장을 선언한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주변 국가들이 과연 한국의 그런 역할을 인정할 것이며, 그런 노력이 있더라도 구체적인 단계에 가서 수용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특히, 미국은 자국 주도의 동북아시아 전략을 갖고 있고, 그 주요 파트너로서 일본을 상정하고 있으며, 최근의 한미 관계가 그렇게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실효성을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는 균형 외교가 맞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한미 관계의 일정한 변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있는 것이다. 특히 ‘동북아 균형자론’의 발언 이전부터 전개되어 온 노무현 정부의 외교 정책, 그 중에서도 대미 정책에 대한 한국 국민 상당수의 우려가 이런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판단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또한 한국의 운신의 폭을 제약하는 것은 바로 ‘북한 변수’이다. 북한은 한국과 피를 같이 나눈 같은 민족의 구성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냉전 시대 소련과 미국의 대리자로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탈냉전 이후에도 긴장 관계를 계속 유지해 오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새로운 한반도 질서가 예견되었지만, 북한 핵으로 인하여 근본적인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야말로 한반도 문제가 남북한 문제가 아니며 국제적인 문제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한국에 있어 ‘분단 시대의 통일학’도 중요하지만, ‘분단 시대의 외교학’이 왜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원론적으로는 ‘동북아 균형자론’이든, 그 무엇이든 동북아시아의 질서와 운명을 이 지역 국가들 스스로 창조하겠다는 발상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표현했듯이 한국은 평화를 애호하고 숭상해 온 국가로서 문제가 안 되겠지만, 중국과 일본은 과거의 전례와 현재의 국력을 감안할 때 얼마든지 동북아시아의 질서와 균형을 깨트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어떤 균형자가 필요한데, 냉전 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 그 이후 지금까지는 미국이 그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만, 미국이 동북아시아 각 국가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일방주의나 패권 동맹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탈냉전의 국제 질서를 지역 국가들과 함께 좋은 방향으로 만든다는 동반자의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국제 정치는 국내 정치와 깊은 함수 관계에 있다. 즉,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동북아시아 각국 정부의 정책에 미치는 국내의 흐름과 판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동북아시아 각국에서 민족주의의 발흥이 충분히 예견되는데,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흐를 경우 이 지역에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각국 정부들이 국민들의 인기를 의식한 나머지 포퓰리즘으로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외교적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한국의 경우, 역대 정부들의 경우에서 잘 나타나듯이 ‘탈냉전 시대의 외교학’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의 외교가 그동안 진일보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전반적인 한국의 국가 경쟁력과 맞먹는 수준으로 외교력을 제고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분단 상황과 전통적인 한미 관계, 그리고 남북 화해 무드, 탈냉전 이후의 변화된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두루 아우르는 외교학을 수립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수록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지도자들의 문제 의식과 통찰력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른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침략을 당했고, 심지어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지금도 민족의 분단 상황에 놓여 있다. 이 비운의 민족이 세계 속의 국가로 당당히 선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국민들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을 제고하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기본 철학이다. 이런 자세에 대하여 주변 국가들은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화해와 협력의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국 정부도 매혹적인 구호보다는 뛰어난 외교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안보 질서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동북아시아의 협력도 중요하지만, 시야를 보다 넓혀 아세안을 포함시키는 동아시아의 협력 방안을 강구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한-중-일 간에는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거리감이 상존하는 것이 사실인 만큼, 동북아시아의 협력을 위해서도 동아시아의 차원의 네트워크가 필요한 것이다.
이번 제주포럼을 통하여 발표되고 제기된 메시지와 논점들을 통하여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에 중요한 한 획이 그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간단한 토론을 마치고자 한다.
노무현 정부와 동북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