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수석비서관 김영주는 지난 주말 국무총리와 전 국무위원이 1박2일을 합숙하며 국가재원배분회의를 하였다. 어떤 이는 열일곱시간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열다섯시간이라고도 하지만, 연속해서 국무위원들이 그렇게 긴 회의를 한 것도 유례가 없거니와 회의 자체의 성격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회의 진행을 본 사람으로서 국민에게 그 의의를 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느낀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모시고 하는 회의에서 그렇게 장시간 사회를 제대로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땀을 흘리게 한 회의였다.
인식을 바꾸는 회의
이 회의를 개최하기로 한 첫 번째 목적은 모든 국무위원이 자신이 맡은 부처의 입장을 떠나 한정된 국가재원을 국가 전체로 본 우선순위에 입각하여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논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에서 얻은 성과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다.
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은 향후 5년간 지출규모, 수지관리, 국채관리 등 총량재정지표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분야별 재원배분은 전략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국정과제 및 내년 예산 쟁점정책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 논의하였다.
그 결과로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큰 방향과 재정배분의 원칙에 대한 합의가 있었고, 주요정책과제들의 추진방향에 대하여 국무위원들 간에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었다. 재정운용의 기본틀이 단기적 관점에서 중기계획으로 넘어가는 큰 변화의 패러다임을 모든 국무위원들이 확인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심각한 당면과제들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고 국가재정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규정한 것이 큰 수확이다.
길게 보기로
지난 40년 간 우리정부는 단년예산, 점증적 재원배분, 단기균형 중심의 재정운용을 해왔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 어떻든 중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 나라의 국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고 경제사회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할 때, 중기예산, 전략적 재원배분, 중기균형으로의 재정운용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해졌고 또 그런 계획을 세우는 회의가 열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력과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기계획으로의 전환은 재정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 양극화라는 성장의 그늘을 해소하고 국민통합을 이루어 행복한 미래로 가야 한다. 경제적 안정을 지속시키고 국가적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밤낮을 가릴 수 없다. 이런 모든 중차대한 문제들이 재정운용의 중기계획 수립에 고려되고 뒷받침되어야 할 사안들이다. 길게 보고 뚜벅뚜벅 갈 수 있도록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다. 재원배분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이 보여준 진지한 자세는 이런 의식의 산물이다.
어디에 쓸 것인가
다음으로 재정투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가 있다. 아주 작은 회사나 부부로만 이루어진 가정에서조차도 돈을 어디다 먼저 쓸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당장 시급한 일에다 쓰는 것은 당연한 원칙이지만, 재정을 장기운용한다고 할 때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는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그 우선순위는 정부가 어떤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결정되게 마련이므로, 이번 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이 큰 방향과 원칙을 도출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할 것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그 방향과 원칙이 지닌 의미이다. 국무위원들은 재정운영의 가장 큰 방향을 세 가지 정도로 압축했는데, 기획예산처에서 발표한 보도자료 대로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재정은 교육, 의료, 주거 등 국민의 기본적 수요 충족을 중점 지원한다.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기본생활을 보장함으로써 기회의 균등을 제공하고 빈곤의 세습화를 차단한다.
재정은 R&D, 인적자원개발 등 미래성장 동력 확충을 중점 지원한다.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제공한다.
재정은 국가안전, 위기관리 등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확대함으로써 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만족도를 제고한다.
언론에서는 이번 회의의 결론을 ‘재정 저소득층에 집중 투입’이라고 한 기사들을 썼는데, 이는 이번 회의결과가 지닌 의미를 너무 한정적으로만 해석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위 3가지 재정운영방향만 하더라도 국무위원 간 미래 발전방향, 재정의 전략적 지원방향 등 국정 전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토론 끝에 어렵게 도출되었던 과정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뜨거운 토론
토론이 가장 뜨거웠던 사안중 하나는 역시 앞으로 개별사업예산 결정시 준거가 될 재원배분원칙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언론이 이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흥미롭게 주목해왔던 사안으로 생각되었다. 내심 회의가 지나치게 팽팽해지면 어떻게 운영이 될까 하는 고민이 없지 않았지만 서로의 주장과 고민이 잘 공유되는 선에서 합의가 도출되었다. 난상토론 끝에 전략적 재원배분을 위한 12대 재원배분원칙을 마련했다.
재정은 ‘국가의 역할과 지원이 필요한 계층에 역량을 집중한다’ ‘재정지원은 가격보조 대신 수혜자 계층에 직접 지원한다’ ‘GNP 대비 일정비율등 국가재원의 사전배분방식은 지양한다’ 등 12개의 핵심적인 배분원칙을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부처의 현안과 국가 전체의 과제 가운데 전체를 우선 고려한 현명한 원칙이라고 하고 싶다.
각 부처에서 문제제기한 과제를 포함하여 쟁점이 되어 왔던 정책과제에 대한 토론은 더욱 민감한 입장차이를 나타내었다. 상당부분 결론이 매듭지어지기를 기대했지만 워낙 쟁점이 첨예한 과제라서 그런지 입장조율이 쉽지만은 않았다. 복지사업 확충, 2009년까지 공적개발원조(ODA) 0.1% 확대 등 사실상 합의에 이른 사항도 있고, 신용보증규모, 에너지 투자재원 대책 등 참석자 간 서로 다른 입장이나 견해차이로 구체적인 합의에 이루지 못한 사항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각 소관부처의 의견을 개진하고 공감대를 넓혀 나감으로써 추후 원만한 협의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분권과 자율, 그리고 책임
이번 회의 결과는 크게 다음 3가지 측면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다. 먼저 논의내용들은 향후 5년간 재정운용방향을 수록할 중기 국가재정운용계획(2005~2009년)에 담겨질 것이다. 둘째 각 부처는 이번 회의 결과를 토대로 마련되는 부처별 지출한도(ceiling)를 통보받고 이 한도 내에서 부처 자율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회의 때 토론된 쟁점정책의 조율내용은 향후 예산부처와 관계부처 간 협의를 거쳐 정부 최종예산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해당정책 예산규모 결정 때 바람직한 의사결정의 토대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국무위원 재원배분회의는 매년 계속될 것이다. 이와 같은 회의가 자기 소관업무와 관계없이 국정 전반에 걸쳐 토론하고 의사가 결정되는 새로운 국정운영시스템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재정 패러다임 전환의 현장
